해남(海南) 대흥사(大興寺) 천불상(千佛像)과 일본 표류(漂流)


전근대 일본(日本)과 한반도(韓半島)와의 교류(交流)는 '표류(漂流)', 즉 우연한 사고(事故)로 인해 일어나기도 합니다. 비록 조선에서 공식적 국가의 사행(使行)을 제외하고는 외국에 나갈 수 없었지만, 여러 기록에서 조선인(朝鮮人)들이 의도치 않게 일본(日本)에 떠내려가 수개월간 머물기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조선 후기 불교 승려(僧侶)와 불상(象)이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오늘날 전라남도(全羅南道) 해남(海南)에 위치한 대흥사(大興寺) 천불전(千佛殿)에 안치된 천불상(千佛像)입니다. 이들 불상은 본래 경상남도(慶尙南道) 경주(慶州) 기림사(祇林寺) 주변에서 당시 저명한 승려였던 풍계현정(楓溪賢正) 주도 아래 조성됩니다. 최종 목적지인 해남 대흥사(大興寺)로 배에 태워져 옮겨지던 중 풍랑(風浪)을 만나 일본 땅에 닿게 됩니다.


그 해가 1816년이었습니다.


<천불상(千佛象)>

조선시대, 1817년, 석조, 높이 25cm, 해남 대흥사 천불전 ⓒ문화재청

대흥사의 천불상은 17세기 후반부터 크게 유행했던 경주(慶州) 불석(沸石)을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경주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지명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주 불석은 흰 색을 띠는 돌이며, 물기가 있을 때는 조각하기에 용이한 부드러운 특성을 지닙니다. 경주에서 우선 제작된 후 주변 지역으로 운반된 것으로 추정 또는 확인되는 불상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으로의 표류

수화승(首畵僧) 풍계현정(楓溪賢正)의 주도(主導) 아래 경주(慶州)에서 제작된 이 불상들은 해로(海路)를 이용해 대흥사(大興寺)에 운반(運搬)됩니다. 이때, 불상들은 각각 232구, 768구로 나뉘어 두 척의 배에 실립니다. 그 중 풍계대사(楓溪大使)와 700여구의 상을 태우고 있던 배가 동래(東萊) 앞바다에서 역풍(逆風)을 만나 일본 치쿠젠(筑前州, 현 후쿠오카 福岡県의 북서부)의 한 지역에 표류(漂流) 됩니다. 당시 모든 표류민(漂流民)은 표착지(漂着地)에서 우선 나가사키항(長崎港)으로 보내진 뒤 송환(送還)되는 것이 일본의 법(法)이었습니다. 결국 풍계(楓溪)와 그 일행(一行)은 뭍에 발을 디뎌 보지도 못한 채 다시 뱃길에 오르게 됩니다.


유숙(劉淑, 1827-1873),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배(泛槎圖)>

조선시대, 1858, 종이에 담채, 25.3 x 15.3cm,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앞서 언급했던 풍계현정(楓溪賢正) 일행의 표류(漂流) 경험은 비단 개인만의 것이 아닌 다수 조선인(朝鮮人)들이 겪은 일이기도 합니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배(泛槎圖)>는 1856년 김계운(金繼運) 일행이 쓰시마(大馬島)에 사행(使行)을 다녀오는 길에 풍랑(風浪)을 만나 표류(漂流)하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폭풍에 휘말려 돛이 부러져 나가는 절박한 상황이 묘사됩니다. 칼을 휘두르는 무사, 두려움에 떠는 사람, 거친 파도 등을 통해 당시 위험천만한 상황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일본으로 표류했던 조선인들은 9,000여명 정도에 이릅니다. 또 김계운 일행과 같은 관리가 아닌 평민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그 기록이 글로 남은 사례가 한정적입니다.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한 풍계현정(楓溪賢正)

나가사키항(長崎)에 도착한 풍계현정(楓溪賢正)과 그의 일행(一行)들은 일본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8)의 국제 항구 나가사키(長崎港)의 이국(異國)적 문화를 접합니다. 특히 이들은 체류(滯留) 기간 동안 현지인들(일본인들)과 접촉하고 교류(交流)하며, 경제, 종교 및 식생활(食生活) 등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나가사키는 네덜란드, 중국 상인(商人) 등 여러 나라에서 무역을 위해 모이던 지역이었습니다. 풍계현정(楓溪賢正)은 이러한 모습들을 일기로 기록해 당시 승려의 눈으로 바라본 이국적 풍경과 국제 항구의 자세한 묘사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나가사키(長崎)는 커다란 도시(大都會)이다.

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며, 민가의 집들이 빽빽히 늘어서있다. 

중국(唐人)과 네덜란드(阿蘭)의 배가 모두 정박하였다. 큰 배들이 서로 인접하여 앞바다에 가득 차 있었다. 

서양의 물화(物貨)가 가득하고, 사람들이 많아, 

가히 ‘집집마다 금(金)과 은(銀)이요, 사람마다 비단옷으로 수놓았다’ 와 같으니,

사람을 현혹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가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이다.

- 풍계현정 (楓溪賢正) 의 『일본 표해록(日本漂海錄)』 일부 발췌 -

 



나가사키(長崎) 항구의 표현

1.  

카와하라 케이가(川原慶賀, 1786-1860), <나가사키항도 (長崎港圖)>, 에도(江戸)시대, 1840-1842, 종이에 채색, 53.5x 76.0 cm, 큐슈국립박물관 ⓒColBase (https://colbase.nich.go.jp/)


2. 

카와하라 케이가(川原慶賀, 1786-1860), <나가사키항도 (長崎港圖)>, 에도(江戸)시대, 19세기, 비단에 채색, 45.0x71.5 cm, 큐슈국립박물관 ⓒColBase (https://colbase.nich.go.jp/)


3. <나가사키 관공서 지도 (長崎諸廳圖畫)>, 에도(江戸)시대, 18-19세기, 종이에 채색, 높이 38.6 cm, 큐슈국립박물관, ⓒColBase (https://colbase.nich.go.jp/)

<나가사키 당관도 및 란관도 (長崎唐館図及蘭館図巻)>

2권, 에도시대, 18-19세기, 종이에 채색, 당관도: 36.6x485.5cm 란관도: 36.6x404.3cm, 큐슈국립박물관 ©큐슈국립박물관

<나가사키 관공서 지도(長崎諸廳圖畫)>와 풍계현정의 1821년 저술 『일본 표해록(日本漂海錄)』을 살펴보면, 이국의 상인들이 지내고 있던 거류지(居留地)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나가사키 당관도 및 란관도(長崎唐館圖及蘭館圖卷)>는 중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의 모습을 담고있는데, 이 시기 중국 상인들이 머물던 곳을 “도진야시키(唐人屋敷)", 네덜란드 상인들 머물던 곳을 “데지마(出島)”라 불렀습니다. 이 두 그림은 상인들의 일상적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당관도>에서는 여러 종류의 나무 풍경과 도박을 즐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청나라인들이 그려진 반면, <란관도>에서는 공작, 염소, 황소 등 매우 다양한 동물들과 건물 1층에 일본인들, 건물 2층에 연회를 즐기는 붉은 머리의 네덜란드인들이 그려집니다.

상세화면

<나가사키 당관도> 

<나가사키 란관도>


조선으로 돌아온 불상

7개월의 시간 끝에 마침내 1818년 이 불상들과 풍계현정(楓溪賢正)의 일행은 나가사키, 쓰시마, 동래를 거쳐, 마침내 해남 대흥사로 돌아옵니다. 이때 이 700여구에 이르는 불상의 뒷면에 일본을 들렸다 온 불상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일’이라는 글자를 적색으로 표시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흥사 천불전에 모셔집니다.



‘日’자가 새겨진 대흥사 천불상

©해남 대흥사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매옥서궤(梅屋書匭)>

조선시대, 1818년, 종이, 32.5x43.5cm,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대흥사의 승려들과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절을 드나들며, 그들과 교류하고 차를 마시기도 했다는 편지와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이 편지는 대흥사 승려 완호 윤우(玩虎 倫佑, 1758-1826)에게 일본으로 표류했던 석불(천불상)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 불상에 글자가 표시된 경위를 알 수 있는데, 정약용은 일본에 다녀온 불상과 이전에 도착한 300구의 불상들을 구별하기 위해 일본의 ‘일(日)’자를 써서 표시할 것을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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