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 초량왜관(草梁倭館)
왜관(倭館)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을 진행했던 공간입니다. 오늘날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위치한 동래부 초량왜관(草梁倭館)은 조선 전기의 부산포, 임진왜란 이후의 절영도 · 두모포 왜관에 이어 네 번째로 설치된 왜관입니다. 초량왜관은 약 10만평의 규모에 500명 내외의 일본 사절, 관리와 상인이 상시 거주했던 조선의 유일한 일본인 거주 공간이었으며, 양국의 지식인들이 만나 대화하고 음식과 미술품 등이 왕래하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18세기 말 이후 통신사행이 중단되면서 일본인들의 조선 그림에 대한 급격한 수요가 발생하자 초량왜관에서는 대일교역용 회화가 전문적으로 제작되어 수출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국교가 제한된 시기에도 양국의 문화가 교류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던 초량왜관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조선시대, 17세기, 종이에 엷은 색, 81.5×460cm,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동래부사가 일본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그림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오는 일본 사절단 일행은 한양에 가서 왕을 직접 볼 수 없었기에 초량왜관에서 외교 의례를 거행하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열 폭으로 구성된 이 병풍그림은 조선에 온 일본 사절을 대접하기 위하여 떠나는 동래부사 행렬과 일본 사절이 왕의 전패(殿牌)*에 절하는 모습, 연향대청(宴享大廳)에서의 연회 장면 등을 시간순서에 따라 그린 것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졌으며 주변의 경관, 건물명과 지명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 동래 지역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전패(殿牌): 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패.
<동래부사접왜사도>의 다양한 장면들
4폭
동래부사(東萊府使)와 부산 첨사(僉使)
4폭동래부사(東萊府使)와 부산 첨사(僉使)
7폭
설문(設門)을 들어서는 동래부사
7폭설문(設門)을 들어서는 동래부사
8폭
조선 왕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일본 사신단
8폭조선 왕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일본 사신단
9폭
성신당(誠信堂)과 빈일헌(賓日軒)
9폭성신당(誠信堂)과 빈일헌(賓日軒)
10폭
동래부사가 베푼 연회
10폭동래부사가 베푼 연회
밀양 동남쪽이 동래(東來)인데, 동래는 동남 바닷가에 있어 왜국에서 우리나라에 상륙하는 첫 경계이다.
임진년 이전부터 고을 남쪽 바닷가에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둘레 수십 리에다 나무 울타리를 쳐서 경계를 정하였다.
해마다 대마도(對馬島) 사람들이 도주(島主)의 문서를 받고, 왜인 수백 명을 인솔하여 왜관에 머문다.
密陽東南爲東萊卽東南海上自倭登陸之初境也自壬辰前於邑南海上創置倭館周圍數十里設木柵爲限對馬島人受島主文引數百倭來留館中- 이중환(李重煥), 『택리지(擇里志)』, 1751.